친애하는 상인
1. 이승만 · 민찬호 · 정한경이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
친애하는 미국 대통령 각하께.
아래 청원서를 각하께 제출하기 위해 서명인들은 미국, 하와이, 멕시코, 중국 및 러시아에 거주하는 150만 친애하는 상인 친애하는 상인 한인을 대변하는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우리 조국의 2천만 동포의 정서를 대변하면서 미국, 하와이, 멕시코, 중국 및 러시아에 거주하는 우리 한인들은 각하께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한국에 조약 의무를 위반하면서 한국을 점령하였습니다. 각하께서 명확히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일본을 지원하고자 전쟁 초에 일본과 동맹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일본이 한국의 정치적 독립 및 영토 보전에 대한 명확한 보장을 하는 대가로 이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이 그 친애하는 상인 전쟁의 전리품으로 한국을 장악한 것은 배신 행위였습니다. 한국 국민도, 한국의 황제도, 책임 있는 총리대신도 한국의 보호국화 및 뒤이은 병합을 결코 재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정의를 힘으로 짓밟은 무력 압력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일본의 한국 점령 이후 한국 친애하는 상인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부당한 지배를 받았습니다. 자원은 개발되고 있으나,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 활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 자원 개발권은 일본 기업에 넘어갔으며, 한국인 기업 심지어 가장 하찮은 기업마저도 일본 기업의 간교한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한국 상인은 일본 정부로부터 우대를 받는 일본 상인과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생계를 영위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고 있으며 한국인들의 비용으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국민들은 산업적 농노로 전락하였으며, 친애하는 상인 경제적 압력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 및 계몽의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한국 점령은 우리 국민에게 여전히 사악한 재난을 야기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공공 문서고와 개인 집에 소장된 모든 한국사 및 한국 문학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였으며, 이것들을 불태웠습니다. 지방의 신문으로부터 과학 잡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모든 문헌들은 완전히 인멸되었습니다. 일본어는 공식 문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공식적인 언어가 되었습니다. 교육 규정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금지하였으나, 신도나 불교(일본의 국가 종교)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모든 학교에서는 역사, 지리 및 한국어가 금지되었습니다. 더욱이 교육 규정들에 의해 한국의 모든 학교가 일본 교육자들의 감독 아래 있게 될 것이며, 한국의 어린이들이 일장기에 경의를 표하고 일본 천황의 위패를 숭배하도록 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 학생들이 학업을 위해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여하한 종류의 공적 모임도 허용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종교 예배도 일본 헌병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교회는, 천명 이상의 한국의 기독교도들이 감옥에 갇혔으며 그들의 활동이 종말을 고했던 널리 알려진 1912년의 ‘음모 사건’(105인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일본 당국자들에 의해 철저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한국 국민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악명 높은 많은 불의들 중 단지 소수의 사례에 관해 간략히 정리한 것입니다. 자치와 정치적 독립에 대한 열정을 가진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는 각하께서 정의의 중재자이자 강자와 약자를 불문하고서 만인을 위한 동등한 권리의 옹호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개별 국가의 특정한 목적들이 인류 공동의 의지에 굴복하게 될 이 중요한 시점에 정의에 대한 몫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각하께서 거중조정을 하셔서 우리에게 도움을 제공하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대통령 각하께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식적으로 연합국과 무관한 민족의 운명에 대해 무언가 제시하는 것이 고상한 과제가 될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처음 2년간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러시아 전선에서 자원병으로서 연합국의 대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거주하는 우리 한인들은 이에 상응하여 인력이나 자금으로 민주주의의 대의에 기여하였습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산업적, 상업적 및 종교적 이해관계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에 우호적인 도움을 보증한 한미조약은 한국 국민에 의해 여하한 방식이나 형태로든 결코 폐지되거나 철회되지 않았으며, 한국 국민들로 하여금 미국의 우애를 짓밟는 여하한 행동도 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자결에 대한 열망을 가진 한국 국민들을 미국이 돕고자 하는 이들 도덕적 의무 이외에 미국은 자국의 이익 보호를 위해 유럽에서 그 원형이 분쇄되고 있는 동안 일본의 프로이센주의(Prussianism)를 극동에서 용인할 수 없으며,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 한국인들이 이국의 속박 속에 살 수밖에 없는 한 세계의 민주주의는 안전할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연합국들이 강화회의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원리로 수용하기로 동의한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에 대한 귀하의 이상 중 하나는 ‘매우 명확한 모든 민족적 열망이 최고로 충족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특히 한국 국민의 매우 명확한 민족적 열망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국민들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그와 같은 정부를 선출할 수 있는 천부적 권리를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각하께서 인식하기를 우리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진= SBS 새 수목드라마 '친애하는 판사님께'
'친애하는 판사님께'가 반환점을 돌았다.
SBS 수목드라마 '친애하는 판사님께'(극본 천성일/연출 부성철/제작 더 스토리웍스, IHQ)가 수목극 시청률 1위 질주 중이다. 시원한 웃음과 묵직한 메시지가 동시에 담긴 스토리, 그 안에서 뛰노는 입체적 캐릭터, 배우들의 열연,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 있는 연출까지. 그야말로 친애하는 상인 무엇 하나 놓칠 것 없는 종합선물세트 드라마로 안방극장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친애하는 판사님께'가 절반을 넘겼다. 제작진에 따르면 반환점을 돌며 더 짜릿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전망이라고. 이쯤에서 '친애하는 판사님께'가 앞으로 들여줄 이야기를, 집중해 봐야 하는 관전포인트를 살펴보자. 알고 보면 더욱 짜릿하고 즐거울 것이다.
◆ 가짜 판사 윤시윤, 정체 언제 들통날까
전과5범 한강호(윤시윤 분)는 사라진 쌍둥이 형 한수호(윤시윤 분) 대신 가짜 판사 행세 중이다. 가짜 판사로 한달을 버텨 뇌물 10억을 챙겨 사라지는 것이 한강호의 목표다. 그러나 위기는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찾아오고, 본의 아니게 튀는 행동과 판결로 법조계는 물론 언론의 주목까지 받게 된 상황. 과연 한강호는 언제까지 정체를 숨길 수 있을까.
◆ 진짜 판사 윤시윤,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1등판사 한수호가 정체불명 남녀에게 납치당했다. 그 사이 쌍둥이 동생 한강호가 대신 한수호 행세를 하며 가짜 판사 노릇을 하고 있다. 한수호는 자신을 죽이려던 이들의 정체를 밝힐 때까지 몸을 숨기기로 친애하는 상인 한 상황. 대체 그들은 왜 한수호를 죽이려 한 것일까. 한수호는 무엇 때문에 이런 위협에 처했을까. 대체 한수호가 품고 있는 비밀은 뭘까. 이는 한강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 윤시윤♥이유영, 마냥 설렐 수만은 없는 로맨스의 향방
사법연수원생 송소은(이유영 분)은 가짜 판사 한강호 곁에서 판사 시보 중이다. 그녀는 한강호의 정체를 모르지만, 다른 판사들과 달리 뚝심 있게 재판과 마주하고 노력하는 한강호를 보며 많이 배우고 느꼈다. 한강호도 정의를 믿고 바른 신념으로 임하는 송소은을 보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성장'의 촉매제가 됐다.
그리고 서서히 이들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핑크빛 설렘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 힘들 때 곁을 지켜주고, 여러 사건과 함께 마주하며 이들 사이에 호감이 생긴 것이다. 단, 앞선 방송에서 한강호가 전과5범인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송소은에게 다가서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마냥 설렐 수만은 없는 두 사람의 로맨스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 윤시윤VS박병은, 두 남자의 포기할 수 없는 대립
가짜 판사 한강호, 변호사 오상철은 여러 재판에서 대립각을 세웠다. 특히 재벌3세 갑질 폭행 가해자 이호성(윤나무 분)과 관련된 박해나(박지현 분)-지창수(하경 분)의 마약 및 폭행사건은 이들 두 남자의 대립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오상철은 한강호가 행세 중인 한수호를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시킬 준비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변수가 생겼다. 송소은이 두 남자의 대립각에 또 다른 도화선이 된 것. 오상철은 오래 전부터 송소은을 바라봤다. 그러나 송소은은 오상철을 밀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런 가운데 한강호와 송소은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이면 일, 사랑이면 사랑. 모든 부분에서 맞설 수밖에 없는 두 남자의 팽팽한 대결이 주목된다.
한편 SBS 수목드라마 '친애하는 판사님께'는 '실전 법률'을 바탕으로 법에 없는 통쾌한 판결을 시작하는 불량 판사 성장기를 그린 드라마다. 반환점을 돌며 더 흥미롭고 짜릿한 스토리를 예고한 '친애하는 판사님께' 17~18회는 오늘(22일) 수요일 밤 방송된다.
예스24 블로그
히말라야는 내게 두려움과 절망의 대상이다. 박영석, 고미영 등 숱한 산악인이 스러진 곳. 뇌리엔 광폭한 산사태와 아찔한 크래바스가 각인돼 있다. 출판사 책세상에서 를 보내왔을 때 한숨부터 나왔다. 요즘 문학에 치우치긴 하지만 평소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책들을 폭식하는 시기인지라, 읽고 쓰는 게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는데 말이다.
책을 읽어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저자인 스티븐 얼터가 당한 불의의 사고와 아버지의 죽음,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순례의 길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선뜻 책장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편집자의 한 마디에 힘을 얻었다. '신체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숨가쁜 등정은 없지만 히말라야를 둘러싼 전설과 신화, 아름다운 자연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히말랴야의 아름다움을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인 작가인 스티븐 얼터는 어디에서나 히말라야의 눈 덮인 봉우리를 볼 수 있는 인도의 작은 마을, 무수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에게 히말라야는 그냥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한 단면이자 일상의 공간일 뿐이다. 울라브 하우게의 시처럼 말이다.
이제 산들은 나를 매혹하지 않는다.
나는 차가운 눈벌판 사이에서 충분히 오래 살았다.
나는 여전히 숲에서 나의 길을 찾고 있다.
산봉우리들이 있어서 너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랬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다. 2008년, 이른 새벽 자신의 집에서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것.'무수리에서 미국인 작가와 아내 칼에 찔리다'란 타이틀로 방송을 타기도 한 이 사건을 계기로 스티븐 얼터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어쩌면 이 책의 핵심(?)이라 할 부분이 바로 난다 데비와 카일라스 등정이다. 고대 신화와 설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악인들의 일화를 곁들이며 풍성한 히말라야 읽기를 선사한다. 그 중 한토막을 소개하자면, 난다 데비에 매혹된 윌리 언솔드의 일화는 가슴 아프면서도, 한편으론 무모한(?) 도전이 빚은 비극이란 생각이 든다. 딸 이름을 난다 데비로 짓고, 딸과 함께 난다 데비로 원정을 떠난 언솔드. 결국 불의의 사고로 딸은 유명을 달리한다. 난다 데비의 품에서 말이다.
인도 원정대가 난다 데비 보호구역의 베이스캠프 근처에 이 산과 이름을 같이하는 미국인 소녀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거친 강풍이 훑고 지나가는 산마루에서 한밤에 머리 위의 별들을 이고 홀로 서 있는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나 또한 바람에 흔들리다가 나를 둘러싼 그림자들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전체의 일부이며 그것에 만족한다." -P147
서두에서 밝혔듯 이 책에는 극한의 도전과 환희 등은 철저히 배제된다. 심신이 쇠락한 저자 스티븐 얼터의 상태도 한몫했겠지만, 히말라야를 걷는 그에게 도전과 정복은 의미가 없다. 어쩌면 치유나 해방에 가까운 심상이다. "내가 찾는 행복은 취한 듯한 기분 좋음이나 영적이 지복인 아닌 공포와 고통과 불안에서 해방된 단순한 만족 상태다. 우리를 사로잡는 어떤 감정을 넘어 슬픔의 부재, 우울감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그에게 '오르다' 보다는 '걷다'가 맞겠고, 성취보다는 치유가 더 가깝다. 작가의 걷기 예찬은 랭보를 비롯한 문인뿐만 아니라 그가 애정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붓다의 말을 빌려오기도 한다. 아래는 걷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소로는 종일 앉아 있는 사람들, 인생을 집 안에서만 보내는 상인들과 학자들을 호되게 꾸짖는다. 그러면서 나무가 빼곡한 숲 속 산책로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영적 환희와 구원을 찬양한다. 소로에게 걷기란 거룩한 복음이다. -P210
걷는 행위 자체가 명상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가우타마 붓다(Gautama Buddha)는 제자들에게 방랑하라고,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고 종용했다. 그리고 이런 조언을 덧붙였다. "너희가 '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수 없다." -P218
권태, 무료함, 무기력 -모두 우리를 우울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리는 불행한 침체감에 한몫하는 감정 상태다-은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생기는 감정들이다. 야외에서 걷다 보면 폐소공포증을 유발할 것 같은 어두운 잡생각이 해소된다. -P231
난다 데비와 카일라스로 향하는 여정을 차분하게 따라갔다. 자칫 읽는 행위 자체가 고독한 순례자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그 어디에도 극한의 등정은 없다. 지나는 길에서 만난 사람과 공간에 대한 담담한 시선이 잔잔하게 흐를 뿐이다. 그런 시선은 자연스레 자기 안으로 흐른다.
(여정에서) 경험하는 고난과 의구심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다른다. 진정한 순례는 얼마나 먼 길을 걸었는가 혹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가 아니라 오직 마음이 가리키는 길을 걸었는가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P243
스티븐 얼터야말로 '오직 마음이 가리키는 길'을 묵묵히 걸었다. 나고자란 곳이지만, 그에게 큰 의미없이 다가왔던 히말라야의 산들. 불의의 습격과 아버지의 죽음이 그를 다시 히말라야로 이끈 건 아닐까? 내 주위에도 히말라야 등정을 자주 계획하고, 도전하는 이들이 있다. 늘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이제는 믿는다. 그들의 마음이 가리키는 친애하는 상인 친애하는 상인 길을 향해 가는 거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그려낸 난다 데비의 장관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성함이 깃든 그곳을 오르진 못하겠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좀더 다른 나와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히말라야를 향한 스티븐 얼터의 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히말라야의 형용 불가한 숭고함은 깊이를 잴 수 없는 존경심과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겸허함과 연민을 품고 산에게 굴복해 산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이 거대한 힘을 오롯이 포용할 수 있다. -P357
억지로(?) 감상을 쓰고 있는 와중에,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이 도착했다. . 히말라야에 이어 죽음이라니.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쉰다.
왜 '난다 데비' 부분을 읽을 때 출판사 '난다'가 떠올랐을까?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온 터라. 자연스레 난다의 책들이 떠올랐다. 김민정 시인에게 물어봐야겠다.
친애하는 상인
이 땅에 빛을! - 2백주년 주교단 사목교서 전문 7
신분과 계급의 차이 뛰어넘어
참으로 한형제로 살자는 운동
발행일 | 1984-02-05 [제1391호, 4면]
11, 선교 2백주년에 우리가 이같이 순교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순교정신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또는 교회를 확장하여 이 땅에서 큰 세력의 종교단체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안됩니다.
그것은 이미 집적 간접 언급한데서 잘 드러나듯이 우리 스스로 그분들이 사셨고 또 목숨바쳐 증거한 그 믿음의 사랑을 이 시대에 이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해서이고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사회와 우리겨레를 그 믿음과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물질만능과 가치관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방향감각을 잃고 어두움에 잠긴 이 사회에 구원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순교선열들은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 역사의 주재자, 모든 생명의 원천, 모든 진리와 정의와 정의의 원천, 모든 사랑의 원천으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뜻, 그분의 진리 그분의 정의, 그분의 사랑을 모두가 깨닫고 살 때에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사회와 겨레의 구원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현세질서 역시 여기에 입각할 때에 바로 서고 나라가 발전하고 번영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열들이 이 믿음을 통하여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소명의 고귀함과 인생의 의미였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현세가톨릭만을 추구하고 현세몰락만을 추구하고 있던 당시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속된 인간은 현세를 넘어 영원을 위해 있다는 것을 깊이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신분이나 계급, 빈부의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와 품위를 지녔음을 확신했읍니다.
당시의 우리사회는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존경받는 때가 아니었읍니다. 인간은 신분과 계급으로 구분되었고 이에 따라 그 대접도 달랐으며 뿐더러 인간의 존재 가치까지 달랐습니다.
양반과 상인의 분별은 엄격하였고 선로 간에는 상하관계 이상의 관계가 있을수 없었으며, 노비와 천민은 주인과 양반들로부터 받는 천시와 인간이하의 취급을 나서부터 죽기까지 숙명으로 알고 감내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회풍조 속에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깨닫고 또한 이를 실생활에서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는 인종의 차별 자유인이나 노예의 차별, 남녀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하나이고, (갈라3·28)모두가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임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러기에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분이나 계급을 떠나서 참으로 친형제 같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교적 전통 가치관에서 볼 때에는 반란이요 혁명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우리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의 권력의 횡포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가 극심한 때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은 일반국민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 하느님의 사랑속에서만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분들은 나라의 공직에 있는 사람은 백성을 위해서 있어야하며 결코 그 반대가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또한 아무리 나라의 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도리에 친애하는 상인 어긋나고 양심에 위배될 때에는 이를 지킬 의무가 없을 뿐아니라 이는 악법으로서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펴는 천주교를 비록 나라에서는 사교로 단정하고 이를 어기는 신자들을 국사법으로 다루어 극형에 처했지만 이법에 순응치 않고 오히려 용감히 그 법에 의해 처형될 것을 알면서도 묵숨을 바쳐 믿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선열들은 박해자를 미워하거나 그들을 원수같이 생각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과오를 깨우치고 회개하기위해 말로써 권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또한 사랑과 평화를 위해 순교한분들이 우리 순교선열들이었습니다.
[철학] 니체의 「아침놀」 : 사회·국가·경제·정치·노동·법·예술, 그리고 고독
171.
근대인의 음식물―근대인은 많은 것을,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소화할 줄 안다. 이것이 야심의 근대적인 형태다. 그러나 그가 거의 모든 것을 소화할 줄 모른다면 그는 좀더 고차적일 것이다. 모든 것을 먹는 인간(Homo pamphagus)은 가장 세련된 종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괴벽스럽고 고집그러운 취향을 지녔던 과거와 아마 우리보다 더 고상한 취향을 갖게 될 미래 사이에 살고 있다. 우리는 너무 중간에 살고 있다.
172.
비극과 음악―예를 들어 아이킬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처럼 근본적으로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민이 그들의 냉혹함을 이기면 연민은 그들을 현기증처럼, 그리고 악마적인 힘처럼 사로잡는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종교적인 것을 전율에 의해 흥분한 상태가 된다. (중략)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은 가장 큰 고통의 약쑥이 혼합된 망아와 놀라움의 환희를 즐긴다. 그것은 전사를 위한 음료수이고 사람들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드물고 위험스럽고 쓰면서도 단 어떤 것이다. 비극은 그렇게 연민을 느끼는 영혼들을 위한 것이다. 즉 비극은 공포에 의해서든 연민에 의해서든 쉽게 정복되지 않지만 때때로 붇러워질 친애하는 상인 필요가 있는 영혼들을 위한 것이다. (중략) 연민의 감정들에 열려 있는 영혼들에게 비극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략) 오늘날 너무나 감동시키기 쉽고 미성숙하며 반(半)인격적이고 호기심 많으며 모든 것을 탐하는, 소멸해가는 시대의 이 왜소한 영혼들에게 음악이 무슨 소용있겠는가!
173.
노동을 찬미하는 사람―사람들이 노동을 찬미하고 노동의 축복에 대해 지치지 않고 말할 때 나는 그것들에서 공익을 위한 비공개적인 행위들에서와 같은 저의, 즉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 사람들은 지금 이러한 노동―이때의 노동이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행해지는 고된 노동을 의미한다―을 보며 이런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예감,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적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가공할 일이다! 바로 노동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이다. 위험한 개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후에는 휘험 중의 위험, 즉 개인이 있다.
174.
상업 사회의 도덕적 유행―도덕적 행위란 타인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되는 행위라는, 현재 유행하는 도덕 원칙의 이면에서 나는 두려움이라는 사회적 충동이 지배하는 것을 본다. 이 충동은 앞의 방식을 통해 지적으로 자신을 위장한다. 이러한 충동은 무엇보다 삶이 이전에 갖고 있었던 모든 위험성이 삶에서 제거되고, 이를 위해 모든 사람이 전력을 다해 서로 돕기를 바란다. 따라서 공공의 안전과 사회의 안정감을 목표로 하는 행위들만이 선한 행위로 평가된다! 그러한 공포심의 전제적인 지배에 의해 최고의 윤리법칙이 정해지고,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무시하면서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곤경과 괴로움을 살쾡이처럼 주시하라는 명령에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일 경우, 사람들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삶에서 모든 날카로움과 모난 것들을 제거한다는 터무니없는 의도를 가진 채 인류를 모래로 만드는 친애하는 상인 최상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언제나 타인에게 직접 달려와 도울 경우와 그러나 이러한 도움은 강압적으로 간섭하고 변형시키지 않을 경우에는 항상 피상적으로 행해질 수 없다. 혹은 저기 자신을 타인이 즐겁게 바라볼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폭풍과 길가의 먼지를 막는 높은 벽도 있지만 손님을 환대하는 문도 있는 아름답고 조용하고 굑리된 정원으로 만들 경우, 그 어느 쪽이 타인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인가 하는 문제조차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175.
상인 문화의 근본 사상―개인적인 경쟁이 고대 그리스인의 정수였고 전쟁, 승리, 법이 로마인의 정수였던 것처럼 상업이 정수인 사회의 문화가 현재 생성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본다. 상인은 모든 것을 만들지 않고도 평가할 줄 알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필요가 아니라 소비자의 필요에 따라 평가할 줄 안다.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소비하는가"가 그의 최대의 문제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러한 평가방식을 끊임없이 모든 것에, 따라서 예술과 학문, 사상가들, 학자들, 예술가들, 정치가들, 민족들과 당파들, 시대 전체의 소산에까지 적용한다. 그는 만들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그것들의 가치를 직접 확장하기 위해 수요와 공급을 조사한다. 이러한 태도가 가장 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철저해지고 모든 의지와 능력에까지 각인되면서 문화 전체의 성격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그대들 다음 세기의 인간들이 자랑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상인 계급의 예언자들이 이것을 그대들의 소유물로서 그대들에게 건네줄 권리를 갖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예언자들을 거의 믿지 않는다. 호라티우스의 말을 빌려 말하건대, 유대인 아펠라로 하여금 믿게 하라. (중략)
177.
고독을 배우는 친애하는 상인 것―오, 그,대들, 세계 정치가 이루어지는 대도시에 사는 가련한 무리들이여. 그대들, 젊고 유능하고 명예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모든 사건에 대해 그대들의 읜견을 말하는 것이 의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실로 항상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그대들은 친애하는 상인 이런 식으로 먼지와 소음을 만들어내며 자신들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수레라고 믿는다. 그대들은 언제나 귀기울이고 언제나 그대들의 의견을 던져 넣을 수 있는 기회를 노리기 때문에 진정한 모든 생산성을 상실해 버린다. 그대들이 위대한 일들을 하려고 열망해도 그러한 일들을 잉태할 수 있는 깊은 침묵은 그대들에게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이 사건을 쫓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날이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대들을 지푸라기처럼 그 사건들이 그대들을 지푸라기처럼 그 사건들 앞으로 몰아오는 것이다. 그대들, 가련한 무리들이여! 무대에서 주역을 맡으려면 합창에 끼어들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아니, 어떻게 합창하는지 알아서도 안된다.
178.
매일 사용되어 닳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는 인격도 재능도 근면함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떤 방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어린 시절부터 그들을 길들였다. 그들이 사막에 보내도 좋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게 되면 그들은 약간 다르게 다루어졌다. 즉 그들은 이용당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박탈당했고, 매일 사용되어 닳아지는 것이 되도록 교육받았으며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매일 사용되어 닯지 않고는 지낼 수 없게 되었고 그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수레를 끄는 이 가련한 동물에게 휴가를 주지 않는 것만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과도하게 노동하는 세기에서 한가함이란 이상은 '휴가'라고 불리는데, 이 휴가 때에 사람들은 한때나마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멍청하고 어린애처럼 굴어도 되는 것이다.
179.
가능한 한 국가를 작게 할 것―모든 정치·경제적 일들은 가장 많은 재능을 타고난 정신들이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정신의 낭비는 곤궁한 상태보다도 근본적으로 더 나쁘다. 모든 경제·경제적인 일들은 보다 열등한 두뇌의 소유자들으 위한 노동 영역이며, 이들 이외의 사람들은 이러한 작업장에서 일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그 기계가 다시 한 번 해체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사람들이 정치·경제적인 일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누구든 언제라도 그것을 위해 일하려 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일은 돌보지 않는 것은 우습기 그지없는 커다란 광기다. 사람들은 공공의 안녕을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한다. 그리고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공공의 안녕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친애하는 우리 세기는 이러한 사실이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처럼 그것을 증명하려 한다! 사회를 도난과 화재로부터 안전하게 하고 상업과 교역을 하기에 극히 편리하게 만들고 국가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에서 섭리적인 힘으로 개조하는 것, 이것들보다 저열하고 범속하며 전혀 불가결하다고 할 수 없는 목표다. 무릇 우리는 존재하는 최고의 수단과 도구를 통해 이러한 목표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수단과 도구는 가장 높고 가장 드문 목적을 위해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경제에 대해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낭비의 시대다. 그것은 가장 귀중한 것, 즉 정신을 낭비한다. (중략)
186.
사업가들―그대들의 사업, 그것이야말로 그대들의 가장 큰 편견이다. 그것은 그대들을 그대들의 장소와 그대들의 사회, 그대들의 성향에 붙들어 맨다. 그대들은 사업의 측면에서 부지런하지만 정신의 측면에서는 게으르고, 그대들의 정신적 빈곤함에 만족하며 의무의 앞치마를 이러한 만족 위에 걸친 채 살고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아이들 역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187.
있을 수 있는 미래로부터―범죄자가 자신이 만든 법을 존중하고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힘, 즉 자신이 입법가의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자랑스러운 감정으로 자지 자신을 고발하고 자기 자신에게 받아야 할 벌을 공적으로 친애하는 상인 부과하는 상태는 생각될 수 없을까? 그가 법을 위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범행을 극복한다. 그는 솔직함, 위대함, 평온함을 통해 범행을 불식할 뿐만 아니라 공공에 기여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미래에 있을 법한 범좌자일 것이다. 이러한 범죄자는 당연히 미래의 입법, 즉 '나는 일의 대소(大小)를 불문하고 나 자신이 만든 법에만 굴복한다'는 근본사상의 입법도 전제한다. 많은 실험이 여전히 행해져야만 한다! 많은 미래가 여전히 어둠을 똟고 그 모습을 나타내야만 한다. (. )
0 개 댓글